"정통신앙과 정통실천의 균형을 회복하라"
많은 분들이 개혁주의를 말할 때 교리 체계로서 개혁주의 신학에만 신경을 쓰곤 한다. 하지만 신학이 어떻게 삶에서 유리가 되어 학문의 체계로만 존재하겠는가? 개혁주의의 정체성은 정통신앙(orthodoxy)과 정통실천(orthopraxy)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혁주의의 정체성은 이단들과 자유주의의 도전에 맞서 ‘바른 믿음의 고백’(true confession of faith)을 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의 윤리적 부패와 세속화에 맞서 ‘바른 사랑의 실천’(true practice of love)을 하는 데도 있다.
계시록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이단들과 싸우면서 정통신앙을 파수하는 일은 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계 2:4). 말하자면 ‘정통신앙’은 있었으나 ‘정통실천’은 없는 교회였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5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아무리 개혁주의 정통신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정통실천을 나타내지 못하면 더 이상 교회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교회의 핵심 표지로 강조한다. 조직신학에서 교회의 표지는 말씀의 선포, 성례와 권징의 실시라고 가르치지만 사도 요한은 특이하게도 사랑의 실천을 교회 정체성의 핵심 표지에 포함시킨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리라”(요일 3:14). 사망에서 생명에 들어간다는 말은 영생 또는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요한의 대답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의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가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을 행했다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의의 실천은 구원의 가시적 열매요 징표이다. 참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중생한 그리스도인인지 속물 그리스도인지를 무엇으로 분간할 수 있는가? 첫째는 그가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참 사랑과 의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는 그 열매로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불러도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신앙고백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론을 맺을 때가 되었다.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생명은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걸맞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교리체계로서 개혁주의 신학 파수에만 신경을 쓰는 동안 심각한 신앙과 삶의 괴리 현상을 겪으면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