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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칼럼 2} 총회를 위한 제언
  • 심창섭 주필
  • 등록 2022-07-03 21:25:58
  • 수정 2022-07-05 13: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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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권주의자들의 ‘정치총회’가 아니라 전국교회의 ‘축제 총회’로-

  

[ 심창섭 교수 ]




 총회를 위한 제언


 -교권주의자들의 ‘정치총회’가 아니라 전국교회의 ‘축제 총회’로-

 


 총회의 의미는 모든 회원국의 회합이다. 유엔총회라고 하면 유엔회원국이 다 참석할 수 있다. 장로교의 총회도 모든 장로교회 회원들이 원칙적으로 다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 총회에 참석하고 싶은 교회와 교인들은 다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최초로 시작된 개신교의 시노드(synod)는 중세의 종교회의 전통과 무관한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개혁 교회의 상황에 맞게 조정된 독창적인 회의였다. 참석자들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인 목사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노회에서 추천된 특정인만 노회대표로 총회에 참석하는 것과는 차별된다. 물론 장로교의 정치제도가 발전하여 노회, 대회, 총회라는 제도가 있어서 노회의 대표자들만 총회에 회원으로 참석하게 되었지만 초기 프랑스 시노드의 근본정신은 각 교회의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장로교의 근본정신이 치리회에 있기 때문에 치리를 위한 총회의 구성원은 목사와 장로 즉 총대들로 구성된다. 즉 총회의 업무(헌의안 등)를 처리할 때는 총대로 구성된 회의를 총회기간 동안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총회는 교단산하의 모든 교회의 총회여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잘 살린 총회가 오늘날 미국 장로교의 총회다. 미국의 장로교 총회는 총대들의 회무 처리 외에 여러 다양한 행사를 통해 총회에 참석한 교단산하 교회의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를 들면 총회개회 예배에 가족단위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축제의 예배를 드린다. 총회에 참석한 교인들은 자유롭게 관광도 하고 극장도 가고 각 종 엔트테인먼트 이벤트에 참석한다. 특이한 것은 각 지역의 교회에서 온 중고등학생들도 총회에 참석시켜서 그룹 활동을 통해 토론하고 학생전도를 위한 활성화 등을 논의한다. 총회 산하의 다른 기관들도 동일한 형태로 참석하여 여러 이슈들을 논하게 된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신앙과 삶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를 개설하여 총회에 참석한 목사와 장로들이 원하는 session에 등록하여 목회사역에 필요한 지식을 함양토록 한다. 미국 PCA의 총회에서 개설한 세미나를 검토해 보면 각종 다양한 이슈들을 중심으로 20개 이상의 세미나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열린 마음, 건강한 토론, 모든 상호 작용에서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는 교회 문화 만들기”,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다”, “당신 교회의 남성들을 위한 제자의 길”, “PCA 목회자의 웰빙 탐색”, “소녀처럼 싸워라! 성적 중독과 싸우는 여성을 제자로 삼는 방법”, “1930년대 개혁주의 부활에 대한 신선한 빛”, “정치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누는 은혜로운 대화”, “당신들 회중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구축하는 데 도움” “위기에 처한 여성을 위한 교회 차원의 대응”, “부부의 번영 돕기: 부부, 목사, 상담교사, 교사를 위한 세미나”, “연로하신 부모를 공경하고 보살피십시오”, “구속 공동체를 위한 환대 교육 및 학습”, “어떻게 팬데믹을 활용하여 비전을 향해 도약할 것입니까”, “교회 내 갈등 예방 및 해결”, “교회개척의 과거, 현재, 미래 경향”, “청소년 스포츠의 위험성과 잠재력”, “사역 환경에서의 트라우마 민감 치료,”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증가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 진화와 인간 기원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 “교회가 정부에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유와 방법.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등이다. 

 


 이러한 다양한 세미나 프로그램을 통해 목회현장에서 체득하고 연구한 주제들을 나누고 경험하게 하므로 목회자의 자질을 높일 뿐 만 아니라 목회현장의 사역을 위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세미나의 강사들도 특정인들에게만 국한 시킨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전문적인 연구를 한 목회자들이 신청하면 강사로 세운다. 총회에 참석한 자들은 다양한 이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의 발표로 인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총회는 교권주의자들의 권력투쟁은 찾아 볼 수 없고 총회가 교단의 축제로 행해진다. 이들의 총회는 정말로 생산적이고 종교적 가치를 엮어 내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의 장로교 총회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번 검토해 보자. 한국 장로교 총회는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와 장로 중심의 총회다. 노회에서 총대로 파송하는 일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서로 총대가 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고 어떤 목사와 장로들은 여러 번 아니 평생 동안 총회 총대로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노회에서 추대되지 아니하면 영원히 총대로 갈 수 도 없다. 이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원하는 노회회원들은 총회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는 전국의 목사 장로들 중에 원하는 자는 누구라도 참석할 수 있듯이. 그러나 참석인원수가 많아서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매년 총회 참석 총대인원수를 맞추어 노회에 배정하고 미리 신청을 받으면 된다. 노회에서도 신청자를 미리 받아 숫자를 조정하면 된다. 총회기간 동안 업무를 처리할 총대는 이렇게 신청자를 미리 받아서 진행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총회에 가족을 데리고 참석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장로회 총회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총회장의 위상과 선거제도 때문이다. 한국장로교단의 총회는 사실상 총회장 선출을 위해 존재하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총대들의 최대의 관심은 부총회장이 누가 선출 되는가에 있다. 부총회장은 곧 다음 회기에 총회장이 되기 때문이다. 교단의 발전을 위한 세미나와 토론회 등은 없다. 부총회장 선출을 하고 나면 총대들은 총회를 많이 떠난다. 할 일을 다 한 모양새다. 남아 있는 총대들은 주로 자신의 교회와 노회에 유관한 사안의 결정을 위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남아서 총대들은 총회의 각종 부서에 자신들이 들어가기 위해 로비를 하고 있다. 새로 구성된 총회장과 부 총회장은 임원회와 상비부 등 방대한 총회부서조직을 위해 총대들을 세우고 1 년간 통치한다. 총회장이 곧 작은 바티칸의 교황처럼 조직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한국장로교 총회의 특유한 정치구조는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 교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총회장 중심의 막강한 통치조직이 형성되고 보니 자연적으로 교권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된다. 총회장 산하의 방대한 공공기관 구조개혁이 이루어지면 운영을 위한 상당한 총회 예산을 줄 일 수 있다. 이러한 방대한 운영을 축소 내지 폐지하려면 총회장의 직무를 축소하면 된다. 

 


 총회장 선출을 둘러 싼 금권선거와 같은 부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다. 심지어 제비뽑기도 등장하였다. 다시 부활한 선거제도는 또 다시 부정선거를 부추겼다. 총회장 선출로 인해 발생하는 금권선거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총회장의 권한을 반드시 축소해야 한다. 답은 간단하다. 총회장의 직책을 총회시에 회의 사회자(moderator)로 규정하고 그 후로는 명목상 총회장으로 1년간 지내도록 하면 된다. 총회 업무는 총무를 중심으로 진행하게 하고 총회장은 감독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총회석상에서 사회 한번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선거비용을 써서 표를 매수할 필요가 없어진다. 총회장의 직무와 기능이 축소 혹은 폐지된다면 총회장 산하의 방대한 정치조직은 축소되어 효율적으로 운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교권주의자들이 득세할 공간이 사라지며 총회는 총회본부 중심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총회장을 둘러싼 정치구도를 없애기 전에는 절대로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전형이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구조처럼 지속된다면 교단은 교권주의자들의 정치적 농간에 놀아나고 발전이 없을 것이다. 대회제도를 활성화 하고 싶어도 총회장이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양보하지 않는다. 즉 총회장이 권력을 분산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회장의 1년 동안의 공식 활동은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제외하고 적게는 110번 많게는 310번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로마교황보다 더 바쁜 모양새다. 이렇게 많은 공식행사에 참여하고 언제 교단의 발전을 위한 미래 지향적인 장단기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총회는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도 없고, 학생들도 참여하지 않고, 청년면려회도 없고, 전국여전도회는 물론 없다. 총대 목사와 총대 장로들 뿐이다. 작금의 한국의 장로교회 총회는 개혁교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정치 집단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정치집단을 청산하고 교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금권선거의 온상인 총회장 선거를 재고해야 한다. 그것은 총회장의 직무를 사회자(moderator)로 국한시키는 길 밖에 없다. 총회가 마치 부총회장과 총회장 선출을 위해 존재하는 모양새는 지양되어야 한다. 총회가 특정한 사람을 세우기 위한 금권 선거의 온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권주의자들의 정치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총회는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성도의 교제(Communio Sactorum)를 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주필: 심창섭 교수

         전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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