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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선교 전략적 의의 1 [ 기획 series ]
  • 심창섭 주필
  • 등록 2022-07-06 18:45:10
  • 수정 2022-07-15 17: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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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대부흥운동은 평신도 주도의 운동이었다.


[ 심창섭 교수 ]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선교 전략적 의의

 (1903 원산기도회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중심으로)

 

 

 

 한국교회는 1907년의 폭발적인 부흥의 열기를 지속해 오면서 20세기 후반에 세계교회가 괄목할 만큼 부흥을 가져왔으며 동시에 해외선교에 관심을 쏟고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들을 후원하는데 기도와 물질적인 헌신을 하였다. 현재 합동 측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만 해도 15개 해외 선교부를 두고 1823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있다. 5대양 6대주의 어느 지역에도 선교사가 파송되지 아니한 곳은 없다. 과거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는 선교의 열기에 젖어 있었고 예수의 지상명령에 부합하는 복음전파에 열심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며 그것의 효과를 점검하고 앞으로서 방향을 짚어 보는 것은 미래지향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메카였던 평양 부흥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부흥의 불길을 불러온 평양 대부흥운동의 요인은 무엇인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부흥을 위해 이러한 요인들을 연구하는 것은 필요한 과제라고 본다.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해외선교사역 부흥을 위해서도 이 요인들을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고로 본고에서는 대부흥운동의 요인들을 검토한 후 이것을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해외선교의 효과를 위한 전략적인 적용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더군다나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효율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 지금은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원산과 평양부흥운동의 특징들 

 

 평신도 운동이었다

 

 근대 한국교회사에 주목할 만한 한국교회의 부흥발전의 원천을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 즉 외적 요인들이나 혹은 네비우스 같은 3자 정책의 콘텍스트 속에서 많이 논해 왔다. 이러한 요인들과 더불어 부흥의 역사를 가져온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한국의 선교는 바로 원초적으로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민초와 같은 무명의 평신도들의 신앙과 연계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같은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교회의 복음화에 중추적인 인물로 평가되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의 밑거름이었던 원산의 부흥운동은 바로 민초들의 열정적인 신앙과 헌신이었다. 원산부흥운동의 핵심인물은 하디(Hardie)이며 그 자신과 주변의 선교사역자들은 모두 무명의 평신도였다. 토론대학의 교회사 교수인 유용식 교수의 연구 자료를 중심으로 이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초기에 한국에 내한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교파적인 개념이나 성직의 개념을 넘어선 평신도 복음사역자가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88년에서 1893년 사이에 내국한 선교사들은 토론토 대학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말 미국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외국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게일(James Scarth Gale), 펜위크(Malcolm Fenwick),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그리고 아비슨(Oliver R. Avison)이었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학생들로서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학생들이었다. 게일은 선교사로 나설 때 신학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26세의 젊은 청년이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선교자격에 의의를 제기” 하기도 하였다.

 

 게일이 1888년 12월 16일 한국에 왔을 때 특정한 선교단체에 속하지도 아니했었다. 그는 3년이 지나서야 미북장로교선교부에 소속했던 것이다. 그는 신분이나 소속이 중요하다는 개념이 없었고 오로지 복음전파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교방법은 서민적이었고 소래마을의 복음화를 위해 원주민과 동화되는 현장투입 형이었다. 

 

 게일은 한국인의 생활 문화를 좀 더 잘 익히기 위해 소래마을을 찾아 한국인들이 입는 옷을 있으며, 한국인들이 취침하는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양반 자세로 앉아 3시간을 버티기도 했는데 다리가 긴 서양 사람들에 있어서는 심한 고문이었다. 그 때에 한국은 천연두, 콜레라, 발진티푸스(typhus) 등과 같은 전염병이 흔할 때인데도 게일은 생명을 내어놓고 한국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복음의 열정을 불태웠다.

 

 한국에 내한한 캐나다의 두 번째 선교사인 펜위크는 중국 내지 선교의 정신과 같이 초교파적인 선교개념과 열정으로 토론토에 소재한 한국연합선교회의 후원으로 내한하였다. 이 회원들은 초교파적인 회원들로서 선교에 열정을 가졌던 대부분의 평신도들이었다. 그는 1936년 1월 7일 원산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복음에 사로잡혀 지칠 줄 모르고 한국 땅을 순회하며 생명을 던졌던” 것이다. 그는 후에 캐나다 출신으로 한국침례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게일에 의해 의료선교사로 부산에 왔던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는 후에 선교지를 원산을 옮겼고 원산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감리교의 요청으로 후에 의료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처음에 교단과 성직에 관계없었던 평신도 선교사역자였다. 그의 원산에서의 경험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특이한 점은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가 원산 부흥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부흥의 불씨는 무명의 여 전도사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를 도왔던 두 명의 여 선교사들에 대해 하디 자신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의 운동이었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기도에 열중 할 때에 이루어졌다. 한국 북동쪽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두 명의 경건한 여자 전도사들은 선교사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선교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명은 장로교인이었고 다른 한명은 감리교인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몇몇 선교사들의 심령에 성령을 충만히 부으셨고 이것은 사경회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는 이 여자 선교사들과 함께 원산 해변캠프에서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는 자신의 선교사역의 실패에 대한 회개가 있었고 자신의 부족과 교만을 자백하면서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각성은 평양으로 옮겨졌고 이때 평양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길선주였다. 길선주는 당시 목사가 아니었고 장로로서 설교하면서 부흥의 횃불을 밝혔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들은 평신도들이었고 이들 평신도들의 헌신과 초교파적인 선교활동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평신도들은 선교사역의 주도권이나 교단 정치적인 역학관계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원색적인 복음전파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개신교의 부흥은 초기부터 기본적인 복음의 속성에 충실한 운동이었다. 



*주필: 심창섭교수

         전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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