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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선교 전략적 의의 3 [ 기획 series ]
  • 편집국
  • 등록 2022-07-15 18: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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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참여를 통한 운동
  • 의료, 교육, 연합사역

[ 심창섭 교수 ]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현실 사회 참여를 통한 운동이었다

  • -의료, 교육, 연합사역-




 의료선교와 함께 기여한 부흥운동이었다.

 

 원산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는 의료선교사였다. 의료 선교는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복음에 대한 의심과 문화의 장벽 그리고 어색함을 무너뜨리고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닦게 해준다. 초기 한국선교에서 의료선교는 바로 이런 역할을 확실히 감당했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복음의 길을 쉽게 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선교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서울의 국립의료원과 세브란스 병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선 백성을 통치하던 최고 기관이었던 왕궁으로부터 호감과 지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의료선교야 말로 선교지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접촉시킬 수 있는 매체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스탠리 솔 타우는 의료선교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외국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의료사업은 의심과 적대감의 장애를 없애고 복음을 수용하기 위한 길을 준비시키는 중요한 역할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복음전파의 외벽을 순화시키는 의료선교는 서울과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지역에는 1904부터 1906년까지 전주, 목포, 군산, 광주 등지에 의료선교 기관들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는 의료선교사였다. 이것은 선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선교는 가난과 질병과 무지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외면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한국사회에서 어두운 그늘에 버려진 여자들에 대한 의료선교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여성 의료 선교의 효과는 한국의 복음전파에 지대한 성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의료선교사들의 주목할 만한 것은 콜레라와 같은 유행성 전염병이 돌때에 가족들까지도 꺼려하는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이들의 행동은 한국인들에게 감동적으로 보인 사역이었다. 한국인들은 이들의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친절한 사랑의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의료를 통한 선교는 복음전파의 길을 평탄케 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인 복음전파의 수단이 되었다. 1929년에 전국에 22개의 병원이 운영되었고 한 병원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 환자의 60%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실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환자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퇴원 후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전도의 기적을 낳곤 하였다.

 

 이와 같이 의료선교는 복음전파의 전령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직접적인 전도의 수단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병원자체에 고용되는 한국인들도 복음화 되어 갔고 환자들이 전도되는 등 의료선교의 영향은 초기 한국교회 복음전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의료선교는 복음의 문을 열게 한 자선의 행위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높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교육사업과 함께 기여한 부흥운동이었다.

 

 의료선교 못지않게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한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초기 선교정책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은 다양한 목적이 있었겠지만 주된 목적은 믿지 않는 학생들을 크리스챤 선생의 영향아래 두어 그들을 크리스챤이 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곧 교육을 통한 선교정책이었다. 그리고 교육선교정책은 단순한 전도 정도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기독교 가정을 형성케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배출한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구도를 갖고 진행되었다. 초창기부터 선교를 위한 교육정책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기독교 학교의 학생수는 공립학교의 학생수를 능가하였고 사회적인 인식도 앞섰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 사업은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야심적인 교육계획을 통해 실현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교회교육을 위해 교육연합회를 만들어 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자국의 모금을 위한 공동전선을 세워서 효과적으로 교육 사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상원위원 “Senate"라 칭하는 운영기구를 만들어 커리의 표준화, 최종시험주관, 학위 수여, 학교의 위치 결정, 운영자금 모금 그리고 자국에서의 후원회 조직 등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효과적인 교육을 통해서 기독교 학교에서는 강한 복음적인 정신이 함양되었다. 왜냐하면 정부의 허락에 의해 합법적으로 성경과 신앙의 가르침을 위한 커리를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년 학교에는 대부흥회가 개최되었고 상급생들은 주일학교의 교육교사로 활동하게 하였으며 전도팀들이 구성되어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역사들이 나타났다. 1918년의 통계에 의하면 송도의 교회학교에 3/4의 불신가정의 학생들이 입학하지만 그들 모두가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학교가 복음전파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연합사업으로 이루어진 부흥운동이었다.

 

 초기부터 선교사들의 연합적인 포교활동 한국교회의 효과적인 전도와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산의 부흥운동도 감리교인과 장로교인이 함께 한 기도회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4개의 장로교선교단체는 한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라는 명칭으로 연합되었으며, 감리교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와 남감리교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감리교회가 한국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for Korea)로 연합하여 조화 있게 전도사역을 감당하였다. 존스는 남북감리교회의 연합운동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마치 같은 선교회의 일원인 것처럼....우리는 선교사 생활의 모든 경험에서 나란히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많은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주고 또 서로 상의하고 있다.....선교사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동정의 공감대가 우리 양 선교회 소속 한국 교인들을 함께 묶어 주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 가운데는 교회를 반대하는 교회가 없다. 우리는 서로 라이벌이 아니며, 이제까지 라이벌이 되려는 의도도 없었다. 한국 감리교가 조직과 성장의 연합과 결속에서 한 가지 강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동일교파의 연합은 연합정신은 물론이고 교파간의 연합운동도 전개되었다. 장감연합공회의 조직이 대표적이다. 1905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제와 상호협력을 위해 총복음회(General Evangelical Council)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결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의 연합적인 복음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1907년 부흥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한국을 전도하기 위한 연합정신의 고조로 이어졌던 것이다. 교파를 초월한 기도와 사경회는 선교를 위한 공동목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합정신은 단순한 교회의 운동(부흥회 등)으로의 공동참여 뿐 아니라 교육과 같은 사회사업에도 협력을 가져왔다. 1912년에 선교연합회(the Federal Council of Missions)가 구성되었다. 이 연합체를 통해 YMCA, 성서공회(Bible Societies), 주일학교교재, 연합활동에 협력을 도모하였고, 선교지역의 적절한 안배 등 많은 사역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기독교문서선교회(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는 일찍이 1890년에 창설되어 복음전파에 지대하게 공헌하였다. 기독교문서선교회는 6개의 국내의 선교연합체에 의해 지원을 받았으며 해외로부터도 많은 지원을 받아서 문서를 통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한국주일학교 연합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상관된 기관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효과적인 주일학교 활동을 통하여 그 결과는 괄목 할만 하였다. 1921-1929년 사이에 무려 254,866명의 주일학생이 등록하였다. 이러한 주일학교의 부흥은 오직 연합활동을 통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합사업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선교사들은 선교지역을 분담하여 서로 상충하지 아니하고 효과적인 복음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북장로 교회는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부 그리고 서울지역과 경상북도에서 활동하였고, 남장로교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도하였다. 캐나다 선교단체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담당하였고, 남감리교감독교회는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부 그리고 경기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감리교회감독교회는 충청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평북일부와 황해남부지역 등에서 사역하였다. 그리고 경상남도는 호주선교회가 주로 활동하였다.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1907년 평양부흥운동과 위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의 연합적인 시너지효과를 통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적인 원색적 복음에 대한 열망과 헌신 그리고 기도와 말씀 위주의 사경회를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경험과 능력의 확신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 성직계급의 평신도의 열정적인 선교열정과 신앙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역을 위한 초교파적인 연합운동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교의 통적인 개념이 초기부터 활성화되어 사회사업(병원, 학교 등)을 통한 기독교의 인지도와 문화에의 적응 그리고 전도의 도구가 실용화 되었던 것이다. 물론 선교사 개인들의 다양한 재질과 능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난 한국교회의 1907년 부흥은 이런 연합적인 특징들의 컨소시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필: 심창섭교수

         전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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