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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 남해에 살어리랏다 3
  • 편집국
  • 등록 2022-08-03 18:27:49
  • 수정 2022-12-22 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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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누리고 전수해야 할 믿음의 유산




홍명유 목사 남해 창선교회 담임목사 

『청년사역, 맨땅에 헤딩하라』저자






우리가 누리고 전수할 유산은 무엇인가?

 

 

 

 지난 5월의 한 토요일 아침, 교회에 나와 이곳저곳을 돌보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날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서부산노회 장로회에서 야유회를 남해로 오는 길에 110년 된 우리 교회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금요일까지 맑고 쾌청했는데 90여분 장로님들의 발걸음을 시샘이나 하듯 새벽부터 봄비 같지 않은 억수같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본당 방송시설을 전도사님과 함께 점검하고 현관 앞에 마른 수건을 깔아 놓고 관광버스 3대가 돌아서 나가기 좋게 주차장의 차들을 다 치우는 것으로 준비는 끝냈다. 


 이제 부산에서 출발한 분들이 교회로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예정 시간이 되어도 버스는 보이지 않고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삼삼오오 교회 마당으로 들어섰다. 웬일인가 했더니 교회 앞에서 차를 돌리기가 힘들다고 미리 광고를 해서 큰 길에 차를 대고 걸어오셨던 것이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정중히 손님들을 맞이하고 본당에서 교회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90여분 손님들 중 우리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분들은 세 분이었다. 우리교회 2대 장로님의 손자이자 은퇴 권사님의 아들인 장로님과 최초 교인의 증손자인 장로님, 그리고 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부산에 이사하신 장로님이었다. 다른 분들보다 이분들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교회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문하고 이 교회의 역사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이 보였다. 다른 분들보다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 보이기도 했다. 


 함께 하신 분들은 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백전노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고 한국이나 외국에 있는 많은 교회를 방문하셨을 텐데 굉장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우리교회에 대해 물으시고 관심을 표현해 주셨다. 특별히 구순을 넘기신 한 장로님은 거동도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참석하시고 가시는 길에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곳이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내가 다녔던 교회와 같은 모습의 교회가 이렇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가지만 계속 남아서 교회를 지켜주시고 복음화를 위해 수고해 주세요.” 너무 의외의 말씀이었지만 감사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있지만 이렇게 처음 뵙는 어르신께 받은 격려는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이곳 남해의 유산은 무엇인가?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에 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관광명소나 건물도 있고 부모님이나 조상이 남겨준 집, 논이나 밭, 산 등이 있겠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고향을 떠올리면 그들의 가슴속에는 값진 유산들이 남아있다. 영어로는 유산을 Legacy라고 해서 전통이란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이전부터 남아있는 어떤 것이 자신의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향에는 많은 유산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산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부산, 창원, 대구, 대전, 서울에 나가 살아도 함께 모여서 그곳에서 자신들이 물려받았고 자신의 뼈와 살을 형성하고 있는 귀중한 유산을 공유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남해의 유산, 남해 사람들에게 깊이 남아있는 진한 기억은 무엇일까? 이것을 남해 사람이 아닌 ‘서울 촌목사’인 내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약간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1/8을, 그것도 황금기를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어쩌면 논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내가 접촉하는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한 평생 살아오신 분들이다 보니 그분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나의 마음에 진한 여운으로 남는 것들이 바로 이분들이 가진 유산이란 생각이 든다. 동시에 가끔씩 방문하는 출향성도들의 입을 통해 듣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역시 중요한 유산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해의 유산은 바다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남해는 섬이기 때문에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바다를 떠나서는 어떤 것 하나도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어릴 적 수영복도 없이 팬티바람으로 혹은 맨몸으로 멱을 감고 놀던 기억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같이 컴퓨터나 스마트폰, 패드 같은 전자기기나 자전거, 킥보드 같은 탈거리나 놀거리가 많고 학교에서 많은 특별 프로그램을 열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쁘신 부모님들의 자유로운 교육 방침에 따라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방학이 되면 하루 종일 바다를 운동장 삼고 친구 삼아서 살아야 했다. 또한 늘 먹거리가 부족한 가난에 허덕였기 때문에 풍부한 물고기나 해산물을 스스로 채취해서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곤 했었다. 

 

 

바닷가 돌덩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돌담처럼…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단체 관람을 가서 본 <섬 마을 개구리 만세>라는 영화다. 1973년 4월 18일에 개봉한, 정진우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신일룡, 김영애와 함께 전남 신안의 사치분교 농구 선수들이 실제로 출연했고 제10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촬영상, 남우조연상, 신인연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의 배경은 전라남도 신안군 사치도란 섬이었다. 1970년대 당시 전라남도 신안군 사치도에 있던 사치분교의 당시 전교생은 약 60 명 정도였으며 이 학교의 교사였던 권갑윤·김선희 부부는 농구단을 만들었다. 비록 섬마을 분교였던 이 국민학교의 농구부는 1970년 전라남도 소년체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그런데 이 농구부 학생들은 제대로 된 고무 농구공이 아니라 짚으로 엮은 농구공을 가지고 뻘밭에서 농구 연습을 했다. 그리고 1972년 제1회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해 농구 남자부에서 준우승을 한다. 특히 운동선수로서의 체력 유지에 관건이 되는 단백질 섭취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개구리를 잡아서 고기 대신에 먹이기도 했는데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당시 이 소식을 접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사치분교 어린이들과 지도교사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리고 이후 사치도에는 선박의 왕래가 편리하게 하는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던 많은 남해 아이들이 성공의 꿈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별히 강한 생활력 때문에 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큰 목소리가 나면 대부분 남해 사람이고 그 중에서 더 큰 소리는 분명히 남해 중에서도 이곳 창선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만큼 어려서부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나갔기에 험한 도시의 환경이나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도 주저하지 않고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도 지금 세간에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물려받은 숟가락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이야기가 어려운 장벽이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금수저, 은수저를 받지 못하고 철수저나 흑수저 혹은 손수저를 물려받은 경우에는 계층 상승이나 성공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믿는 강력한 사회적 통념이 이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바다와 척박한 환경에서 길러진 마음과 몸뿐인데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비록 망망대해와 같은 세상에 사정없이 던져진 것 같았어도 고향에서 받은 귀중한 유산인 바다는 이들을 지탱해주는 귀중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아무리 거친 파도가 몰려오고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 태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바닷가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와 집을 감싸고 있는 돌담의 돌들처럼 그들은 굳건했다. 집이 무너지고 나무가 쓰러질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은 곳이 어촌이고 이곳 남해의 섬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도 높이를 낮추고 지붕의 재료도 신경을 많이 써서 고르고 잘 붙들어 매야 한다. 그렇지만 비바람에 의해 집이 다 사라지는 피해를 당할 경우가 많은데 다음 날 바다에 가보면 바위는 한 치의 요동도 없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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