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탐욕의 꿈이 아니라 사명의 비전을
  • 편집국
  • 등록 2022-08-11 05:51:01
  • 수정 2022-08-11 05:51:26
기사수정
  •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 총회는 권력 헤게모니가 아닌 섬김의 자리가 되어야



이국진목사 / 예수비전교회




탐욕의 꿈이 아니라 사명의 비전을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그랬었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그랬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건물주라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건물주 아들이 되는 게 꿈인 데, 도무지 아버지가 협조를 하지 않네요.”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공부 좀 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의대에 가고 싶다고 하고, 청년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이기적인 꿈이라는 점이다. 그저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잘 누리기 위한 꿈이다.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볼 때 너무 안타깝고 그들을 치유하여 주고 싶은 마음에 의대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편안하게 돈을 잘 벌 수 있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에 다들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시민들에게 좋은 봉사를 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공무원이 되려는 게 아니라,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 시대에 다들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것은 대통령이 멋있고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what)이 되는가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how) 사는가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사울과 다윗이었다. 사울은 현재의 왕이었고, 다윗은 미래의 왕으로 기름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다. 현재의 왕인 사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왕권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윗을 도왔던 아히멜렉 제사장 무리들을 죽여버렸다. 사울에게 있어서 왕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위협을 받을 때, 가차없이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윗은 미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가게 된 것은 섬김의 자리였다. 사울 왕이 정신 착란을 일으킬 때, 다윗은 그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금을 타는 자의 자리로 갔다.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지만, 정작 그는 사울의 종이 되어 사울을 섬기는 자리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사울의 신하가 되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위험을 감수하였고, 나중에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쫓겨 다니면서도, 다윗은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품었다(삼상 22:2). 다윗은 아둘람 굴속에서 산적 두목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거기서 다윗이 한 일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었다. 



사실은 그게 왕이 해야 할 일이다. 억울한 자들에게는 정의를 베풀고, 슬픈 자들에게는 위로하며, 약한 자들을 돕는 게 왕의 일이다. 왕의 자리에 있었던 사울은 왕의 권력이 주는 것을 붙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살았지만, 다윗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지만, 왕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았다. 왕의 자리는 사울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왕처럼 일한 사람은 다윗이었던 것이다. 



총회는 권력 헤게모니가 아닌 섬김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매년 총회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과연 무슨 마음으로 나서는 것일까? 그저 명예와 욕심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진정으로 총회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일까? 어떤 출마자들은 수년 전부터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면서 착실하게 준비를 해왔다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걱정스럽다. 장로라는 직분이 섬김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자리가 되거나 교회의 헤게모니를 쥐는 자리가 될 때, 그런 장로가 장악한 교회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직책을 그저 자신의 이기적 야망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보는 이들이 차지하게 된다면 총회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주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고, 메시야로 오셨다. 하지만 왕의 권력과 자리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태어나신 게 아니라,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나셨다. 왕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신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섬기는 종의 삶을 사시다가 결국 피까지 흘려주셨다. 그러한 주님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라면, 탐욕의 꿈이 아니라 사명의 비전을 품어야 할 것이다. 



☞이국진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과 및 신대원 졸업

 -노스 웨스트 대학교 신학박사(Ph.D.) 

 -육군 군목 대위 예편

 -대신대, 전북신학원, 횃불회 등 강사 역임

 -'돈인가, 예수인가?' '예수는 있다' 등 저서 다수

 -현, 전주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


0
dummy_banner_2
dummy_banner_3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