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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변신은 무죄! (1)
  • 편집국
  • 등록 2022-12-22 17:22:26
  • 수정 2022-12-22 17: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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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변신

 

 

홍명유 목사 남해 창선교회 담임목사 

『청년사역맨땅에 헤딩하라』저자 






인생의 변신은 무죄!



정 목사님의 아름다운 변신 




 노회 주관 이스라엘 요르단 9박 10일 성경 지리 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넓은 마늘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 농부가 눈에 들어 왔다커다란 체구에 허름한 옷을 입고 시장에서 파는 5천 원짜리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마늘 밭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뽑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마늘종(마늘쫑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사실 마늘종은 마늘의 꽃줄기로 그것을 뽑아 주어야만 밑에 있는 뿌리에 해당하는 마늘이 튼실하게 자란다그래서 마늘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이맘때가 되면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다동시에 마늘 가격의 변화가 심한 요즘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마늘종 뽑기 작업을 열심히 하면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다그래서 마늘의 크기도 키우고 소득도 올리는 일거양득인 샘이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땡볕에서 밭을 돌아다니며 마늘종을 잡아서 뽑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땅을 쳐다보는 한결같은 자세를 계속해서 유지하기에 목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허리도 몹시 아픈 일이다그리고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마늘종을 굵기와 길이 별로 가지런히 선별해서 다음날 아침 농협에 출하하려면 때론 밤을 새우는 날도 있다고 한다.

 열흘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기에 운전하는 분에게 클랙슨을 울려 달라고 요청하고 유리를 내린 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 


 둘 사이에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간 후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여행지에서 삶의 현장인 현실로 무사히 복귀함을 알려주는 이정표라는 느낌을 받으며 자동차는 마늘밭을 지나쳤다

 

 

팔순 어르신 목사님의 궁금한 인생 역정

 

 방금 전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는 매우 특별한 분이다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세가 높을 뿐 아니라 가장 화려한 인생 경험을 가졌지만 가장 짧은 농사 경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연세가 80세가 넘으셨지만 이제 인생의 5학년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나보다 건강하고 힘도 세시고 부지런하시기 때문에 앞에 설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게 해주는 거인 같은 분이시다물론 키도 나보다 크고 체형이 나의 두 배나 되기에 느껴지는 마음일 수도 있지만 이분이 살아오신 인생의 과정을 보면 인생의 선배로서 배울 것이 많은 분임을 깨닫게 된다특별히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에서 내렸던 결정들이 인생 후배인 나에게 귀중한 도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분을 만나게 된 것은 2015년 5월 초였다원래 남해의 한 오지에 있는 은강교회에서 18년 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그때 마침 드디어 기다리던 적합한 후임자가 부임하여 은퇴를 결정하고 우리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오지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곳은 남해군의 주요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높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당시 하루에 버스가 한 번 밖에 들어가지 않았고 요즘에도 단 네 번만 경유하는 곳이다자가용이 많이 보급되어 대중교통 의존도가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주민들 대다수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다 보니 출입에 매우 불편을 겪는다당시 운행되는 버스조차도 민간회사가 아닌 군에서 직접 운영하는 버스였다고 한다그런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했으니 여간 불편하고 힘든 것이 아니었을 텐데은퇴를 훨씬 넘긴 때까지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고 드디어 짐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셨을 때 첫 등록 심방을 하면서 그곳에 가신 이유와 목회 과정에 대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바로 인생의 변신은 무죄라는 것이다화장품이나 여성 패션 용품 선전에 자주 등장하는 카피 문구 같지만 인생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위에 소개한 정종익 목사님은 본래 이곳 출신이 아니시다전남 강진의 가난한 산골 출신인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그 시절 농촌 출신 사람들의 서울 정착기가 다 그렇듯 얼굴을 아는 사람도친척도 없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그러다가 만난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종로에 있는 큰 회사 빌딩에서 잔심부름과 청소를 하게 되었다혈혈단신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에 한 줄기 소망이 보이기 시작했고 야학을 통해 학업을 꿈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그 후 성실함을 눈여겨 본 회사 측의 배려로 한 대학의 야간학부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까지 하게 되었고 가정도 이루었다

 

 

고달팠으나 보람된 아메리칸 드림

 

 고생 끝에 얻은 작은 행복이었지만 그는 1975년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어린 세 아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어렵게 들어간 회사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당시 단어조차 낯설었던 이민을 떠난다고 하니 사람들이 걱정하던 시절이었다가난했던 나라 살림 때문에 주머니에는 초기 정착금으로 미화 300불 밖에 없었고 옷과 간단한 살림 도구가 담긴 이민 가방을 가지고 시카고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타국 생활이었지만 소망을 가지고 도전했다밥상도 없어서 박스를 조립해 사용하면서 날마다 온 가족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미지의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그곳에서 처음으로 얻은 직업은 빌딩 청소 일이었다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퇴근한 시간인 저녁 7시에 빌딩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쓸고 닦고 쓰레기를 치우고 다음 날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귀가했다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일했고 주어지는 보수에 감사했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도보로 출퇴근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강력 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우범 지역이었다고 한다지갑에 20달러짜리 라이프머니(목숨을 위한 비상금)를 챙겨두고 다녀야 하는 곳이었지만 미국 생활에 감사하고 기쁨으로 다녔더니 그런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그 후 세탁소를 하면서 아침 7시에서 저녁 7시까지 거의 서서 일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았지만 감사함으로 감당했고 고된 삶속에서도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다매주 금요일 밤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세 시에 마치는 금요 철야기도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


 특히 감사했던 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이 바르게 성장해 준 것이었다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 삼형제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 목사님의 양육 철학대로 집에서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형제간의 예의를 지키고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일을 아들들이 지켜주었다신앙생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기 때문에 장남의 졸업식에서 학부모 축사를 하는 영광도 얻었다아들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의사내과의사민항기 조종사가 되었으니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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