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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역의 성경적 원리 2
  • 편집국
  • 등록 2022-08-17 10: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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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눌린자들을 위한 치유사역
  • 사회봉사 의료사역


[ 심창섭 교수 ]




선교사역의 성경적 원리 2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서인 사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 선포라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 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사역은 다음과 같은 선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눌린 자들이 치유되는 사역이었다.

 

 예수의 사역의 대상에 대해 마태는 복음사역 초기에 정보를 제공한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납달리와 즈불론 같은 이방 땅,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였던 것이다. 갈릴리는 쌍놈들의 소굴이었고, 예루살렘의 대지주들에 의해 소작민들이 착취당하는 지역이었다. 빚진자들과 무산자들이 재산가들에 대항해서 고된 삶을 살던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민중의 봉기와 도적떼들이 득실거리던 곳이었다. 가난자한들과 병자들이 제대로 치유를 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주변에는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굶주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4천 혹은 5천 명씩 몰려들었던 것이다.

 

 예수의 사역의 대부분은 이런 불행한자들을 위한 사역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육체적인 고통으로 시달리는 환자들과 가난한자들 그리고 의지할 때 없는 과부로 붐비었다. 특히 공동체에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의 친구였던 것이다. 예수를 공격한 정통적인 종교인들 집단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불쾌감을 금치 못하고 예수와 제자들을 불경건한자들로 공격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세리에 대한 태도와 예수의 그들에 대한 견해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를 천대하고 멸시하는 기득권층의 종교인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눅 7:34) 뿐만 아니라 세리들이 세례를 받게 되어 사회의 일원으로 회복시켜 주셨으며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변호하셨던 것이다.(마 9:12)

 

 예수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아예 갈릴리의 무리라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에 그가 잡혔을 때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느냐고 묻는다.(마 26:19)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 예수와 틀림없이 한 패거리라고 묻고 있다.(막 14:70) 그래서 복음서는 갈릴리 사람들과 떼어놓고 예수를 생각 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가는 담대히 예수는 갈릴리로 갔다고 고백한 것이다.(막 1:14)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와 함께 갈릴리를 끊임없이 연상시키고 있다. 예수를 시중들던 갈릴리 여인들(막 15:41), 부활하신 후 예수 스스로 갈릴리로 먼저 가겠다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막 14:28, 16:7)을 비추어 볼 때 예수가 갈릴리로 간 것은 바로 이곳에 있는 “흑암에 앉은 백성들” 그리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예수의 사역의 행보는 같은 처지에 있었던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 사역을 전개할 초기의 소명과 일치하는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의 소명은 자신이 선포하신 대로 눌린 자, 포로 된 자를 위해 갈릴리를 선택하셨으며 그의 천국복음은 이러한 연약하고 소외 당한자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한국초기의 선교, 특히 원산과 1907년 대부흥 운동은 그 주역이 무명의 선교사들로 인해 점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 대상도 일제의 침략을 비롯한 동북아의 정치적인 위협과 대변화의 어두움과 그늘에 앉아 있던 한국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초기부터 선교사들은 한국 시골로 다니며 무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한국의 갈릴리 사람들과 같은 계층을 상대로 복음화 했던 것이다. 원산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화는 곧 한국의 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4) 사회봉사와 의료사업의 사역이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가난한자를 돌보시고 환자를 고치신 기적 사건들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다. 복음사역은 인간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과 절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질병이야 말로 억눌림과 가난과 패배의 애환을 함께 몰고 올 뿐 아니라 삶의 본능을 말살시키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주체 세력인 인간이 건강하기를 원했다. 아니 자신의 뜻을 실행할 도구이기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이다.(요 3:16) 예수의 복음전파 행보는 곧 치유의 기적으로 연결 되지 아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안식일의 규례까지도 무시하면서 가버나움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면서부터 시작된다.(막 1:21-27) 마가는 특히 예수의 병 고치는 사건이 복음사역의 전위부대로 등장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고(마 1:29-31), 안식일이 지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데려왔고 예수는 온 종일 환자들의 치유로 보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막 1:34-2:12) 그리고 불치의 병들이 고쳐진다. 나병환자나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은 것이다. 예수에게 사람들이 몰려 든 것은 예수가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라고 마가는 보고하고 있다. 

 

 예수의 이러한 치유의 기적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치유사건을 제외하고는 그의 복음사역의 이해와 해석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많은 경우에 혼자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저들이 가족이나 부락공동체에서 무시되거나 절연되었음을 의미한다. 불치의 병자는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보호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고 버림 받게 되어 있었던 사회였다. 그래서 혼자 남겨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한은 삼십 팔년 된 환자의 외로운 투병생활과 버려둠에 대한 애타는 심정을 담아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접근 했을 때 아무도 예수에게로 자신을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가 고친 많은 병자들 특히 나병환자, 더러운 귀신들린자, 벙어리, 소경 등 모두 반사회적인 불치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들은 유대사회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병들이기에 유대종교의 정결 법에 위배되는 질병이라고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척당했던 병들이었다. 예수를 찾아 온 환자들 뿐 만 아니라 가족들도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에는 예수로부터 치유를 받은 자들 중에서 회당장이 가장 높은 사회적인 신분을 가졌으며(막 8:22-23) 그 외에는 단 한사람도 사회적인 직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있다.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주로 여인들, 아이들, 거지들, 종들이었던 것이다. 예수에게 찾아왔던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군중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기독교 역사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지어 주었다.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복음사역의 현장에는 언제든지 환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치료사업이 동반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복음사역의 초기도 바로 환자들의 치유사역이 함께 이루어졌으며 원산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하디(Hardie)는 바로 의료선교사였던 것이다. 한국복음전파 역사에 교두보 역할을 담당한 사역은 의료선교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부흥운동에서 성령의 은혜와 감격 그리고 말씀의 능력을 수용할 수 있는 심령의 밭갈이 작업이 환자의 치유사역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산과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일어난 한국의 부흥운동은 예수의 치유사역을 모델로 한 의료선교와 같은 치유 사건들이 수반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복음사역이 영과 육을 동시에 치유하는 통전적인 해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5) 예수의 복음사역은 협력체적인 입체 사역이었다.

 

 예수의 사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아독존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계급이나 혈연이나 신분으로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자신들도 어떤 인맥을 형성하거나 특정한 부류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예수의 뜻에 참여하는 자는 함께 복음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들은 각종 다른 종류의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들은 어민들이었고, 마태는 세리였으며, 누가는 의사였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 사역에 숨은 공로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인들이었다. 또한 군대의 백부장도 동참했던 것이다. 권력층을 대변하는 니고데모도 있었고 부유층을 대표하는 아리마데 요셉도 있었다. 이들이 초대교회의 복음사역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는 정신을 가졌던 것이다.

 

 실제로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 그 자체가 팀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고 생활하면서 철저한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70인을 보낼 때 그리고 제자들을 파송을 할 때 둘씩 짝을 지어 사역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팀 사역의 정신은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선교가 바로 그것이었다.(행 13:1ff)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할 때 팀을 구성하여 보냈던 것이다. 바울과 바나나 그리고 마가였다. 팀으로 구성된 3사람의 기능은 달랐다. 바울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과 구사력을 가진 자였다.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으로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자였다. 그리고 마가는 젊은 사람으로서 여행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가에게는 예수에 대한 생생한 자료들이 있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장소가 마가의 집이였기 때문에 마가는 제자들로 통해 예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어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바울은 개종하여 3년간을 아라비아에서 지내다가 예루살렘에 왔으나 예수의 제자들의 반대로 정착을 못하고 다소에서 지내다가 안디옥에 왔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정황에서 마가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도 재원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3사람은 팀이 되어 복음사역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그 후에도 디모데와 더베의 가이오, 아시아의 두기고 소바드 등을 동역자로 삼았고, 빌레몬서에서는 요디아와 순두게를 동역자로 삼았던 것이다.(빌레몬서 4:2-3) 특히 고린도에서는 로마에서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동역자로 사역했던 것이다. 물론 이 때 디모데의 동참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행 18;1ff) 이러한 사역의 동참은 기능의 역동성과 효율성의 증대에 기여했던 것이다.

 

 원산과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요체는 바로 선교사들과 한국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신분에 무관한 연대 속에서 함께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던 것이다. 부흥운동 이후에 나타난 한국의 선교사역도 역시 선교부와의 협력체 속에서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선교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원산과 1907년 부흥운동의 특징들을 검토해 보았으며 그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선교 원리와의 관계에서 동일한 선교의 원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 한국의 해외선교의 활동은 이러한 원리와 얼마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현장을 살펴보면서 미래지향적인 선교전략을 제시해보려 한다. 



*주필: 심창섭교수

         전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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