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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 2차대각성운동(1795-1855) 2
  • 편집국
  • 등록 2023-10-17 09:44:11
  • 수정 2024-04-18 08: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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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 부흥은 전인적인 변화
  • 부흥으로 인한 인간의 존엄성 인식

[ 심창섭 교수 ]





미국의 제 2차대각성운동(1795-1855) 2

 

피니의 부흥운동에 나타난 회심의 광경은 다른 경우보다도 열광적이고 감정적인 회심의 장면들이 자유롭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가 집회할 때에 손을 흔든다든지 몸을 땅에 딩구는 현상들로 자유롭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의 목소리도 놓았다. 유명한 설교가인 라이만 비쳐 같은 사람은 피니의 전도 집회 모습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쳐는 나중에 피니의 집회와 부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신앙 부흥은 전인적인 변화

 아주 단기간에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와 세계에 있어서 가장 큰 종교의 부흥이 피니에 의하여 일어났다. 그의 위대한 부흥의 결과로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교회에 새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으니 이것은 교회사와 또한 종교발전사에 있어서 특이한 일이었다.(E S. 모이어 p. 426)

 

 피니의 이러한 열광적인 부흥운동은 개인의 회심이 사회적인 관심과 개혁을 이완한 이원론적인 중생체험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니는 교회가 사회개혁에 무관심 한 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찰스 피니는 신앙부흥에 대한 그의 23번째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회의 위대한 사업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교회는 본래부터 개혁자들의 기구로 조직되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 자체가 실제적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개혁을 위하여 행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맹세와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존 스토트 1995 p. 19) 

 

 제 2차 대각성운동은 신앙의 부흥이 곧 인간의 전인적인 변화와 연관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1차 대각성운동 때와 같이 대학의 설립에 공헌하였다. 찰스 피니는 자신이 오블린 대학(Oberlin College)의 총장이었고 그의 영향으로 오블린대학은 미국의 가장 중심적인 부흥센트가 되었다. 귀족적인 것보다 민주적인 대학의 고등교육은 바로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대학의 교육기회가 일반인에게도 보편화되는 전환기가 되었던 것이다.

 

 1851년 미국선교회의 총무였던 압살롬 피터(Absalom Peter)는 이제 팽창이 예상되는 인구와 지역 그리고 주들의 독립 등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어느 지역에서도 편리하게 사람들이 교육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이 땅은 대학교의 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William Warren Sweet p. 150-151) 이때부터 감리교와 침례교도 대학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830년까지 감리교는 한 개의 영속적인 대학을 세우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 후로 남북전쟁 때까지 34개의 대학을 세웠다. 침례교는 1830년에 3개의 대학을 세웠고 1861년까지 무려 25개의 침례교 대학을 세웠던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인식

 대각성운동이 가져온 인간의 개인적인 영혼의 가치에 대한 신앙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특권층의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회심운동의 결과였다. 당시의 노예제도는 이 법칙에 가장 반하는 비 복음적인 인간이 만든 죄악이었다. 피니를 중심한 대각성운동은 필연적으로 이런 사회적인 병리현상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흥운동의 영향이 반노예운동과 관계된 가장 놀랄만한 사건은 신시네티에 있는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 후에 Oberlin College로 전속됨)를 중심한 운동이었다. 이 중에서 뛰어난 인물은 데오도르 웰드(Theodore D. Weld)교수였다. 그는 찰스 피니에 의한 회심한자였으며 그리고 가장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는 레인 신학교에 재학 중 학생들 가운데서 노예 페지에 대한 운동을 전개하여 총학이 그의 운동에 동참할 정도였으며 남부 출신의 신학생들 까지도 동참하였다.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론적인 외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신시니티 주변의 흑인들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제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흑인들을 위해 학교를 개설하고 독서방과 도서관 등을 설립하였다.(William Warren Sweet p.158) 

 

 이러한 운동은 한편으로 상당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흑인들과 신학생들 사이에 혼혈현상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 다닐 정도였다. 학교 당국의 주체세력들이 개입하여 학생들의 노예제도 폐지활동을 폐지하고 토론활동을 중단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대다수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찰스 피니를 오블린 대학 총장으로 모셔온다는 조건으로 오블린 대학에 전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피니의 도움과 함께 다시 노예폐지 운동에 활기를 뛰게 하였고 이것은 노예폐지 운동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William Warren Sweet p. 158)

 

 그리하여 1830년부터 1860년 사이에 미국은 "감상적인 시대"(The Sentimental Years)라고 불리울 정도로 선교와 관용을 넘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국내외선교회들이 조직되었고, 성경과 전도책자회들(Bible and Tract Societies)이 조직되었다. “모든 가정이 성경을 갖게하라 그리고 모든 손에 전도책자를 갖게 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주일학교가 증진되었고, 항구의 선원들이 구원받으며 담배폐지와 다이어트 운동과 평화를 증진시키고, 감옥들을 개혁하며, 매춘제를 중단시키고, 아프리카의 흑인식민지화를 반대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운동 등이 일어났던 것이다. 길버트 셀드(Gilbert Seldes)는 1820년과 1830년대의 부흥이야 말로 미 국민들의 사회적 지적 삶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였다.(William Warren Sweet p. 160)


*주필: 심창섭교수

         전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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