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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John Calvin) 신학의 한국 유래
  • 편집국
  • 등록 2024-01-04 1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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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칼빈의 소개
  • 1980년대, 칼빈에 대한 활발한 연구

[존 칼빈]




"존 칼빈(John Calvin) 신학의 한국 유래"

 

 유럽 역사에서16c 이후 칼빈이 끼친 영향력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칼빈의 영향력은 루터보다 더 광범위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영향력은 서구 사회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도 그 영향을 두루 끼쳤으며 한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존 칼빈(John Calvin)의 소개(조선후기)

 칼빈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 선교사들의 도래 이후였다. 물론 기독교와 관계없이 서양사를 통하여 칼빈이 한국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 사실성은 매우 희박하다. 사실상 한국에서 칼빈이라는 인물이 처음 소개된 것은 평양신학교에서였다.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인물은 호주 선교사 왕길지였는데 이를 통해서 갈빈(칼빈)이 처음 소개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숭실학교 교과서로 제작된 만국통감은 당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서양사 교제였고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이것이 칼빈을 한국에 소개하는 기초가 되었다. 

 

 신학지남의 경우 1934년 7월호에서 최초로 칼빈을 소개하는 특집호를 발간하는데 평양 신학교 교수들 아래의 7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 논문과 함께 칼빈의 설교, 핍박이 김재준의 번역으로 게제되었다. 이과 같은 것을 살펴 볼 때 이전까지 한국에서의 칼빈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는 매우 미미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을 십분고려한다 하더라도 이같은 현상은 한국 장로교 신앙전통에 대한 무관심의 반영일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에 대한 연구 시작(해방이후)

 해방과 함께 신학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한국인의 신학연구가 시도되었다. 이전까지 신학교육은 전적으로 선교사들의 영역하에 있었고 선교사가 주도하였다. 칼빈, 혹은 칼빈에 대한 논문은 1960년대에 석사학위 논문으로 나타난다. 그 첫 논문은 196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제출된 박성모의 칼빈의 인간이해와 근대 시민사회였다. 이때부터 79년까지 23편이 칼빈에 대한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보아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칼빈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독교 강요와 함께 1970년대에 칼빈의 설교집이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함께 설교집의 수요가 높아졌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이후 비로서 칼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특히 칼빈에 관한 외국학자들의 저작이 역간됨으로 칼빈과 칼빈에 대한 신학연구가 깊어졌고 창의적 칼빈 연구의 길을 열어갔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존 칼빈(John Calvin)에 대한 활발한 연구(1980년대)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칼빈 연구는 새로운 단계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와서 비로서 칼빈 학자가 나타나고, 칼빈 혹은 칼빈 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물이 출간되고, 또 기독교 강요 등 칼빈의 원저들이 역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칼빈에 대한 관심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이 다 칼빈 전공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후 많은 학자들이 칼빈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고 칼빈에 대한 연구와 외국 서적의 역간, 그리고 칼빈 원전의 역간은 한국에서의 칼빈연구가 1980년대 이후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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